2011. 11. 30.

현리 전투와 유재흥 장군에 대한 생각



현리 전투와 유재흥 장군에 대한 생각


  현리 전투에 대한 얘기를 처음으로 들은 것은 군대 현역 시절 후반기 교육에서였다. 그 때 교관으로부터 들었던 것은, 한국전쟁 당시 현리 방면에서 중공군이 국군 군단의 철수로를 차단하였고 국군이 그대로 붕괴되었다는 간단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전례집과 여러 교범에서도 현리 전투에 대한 언급은 비교적 많은 편이었는데, 그만큼 이 전사는 우리 국군의 역사에서 깊은 인상과 상처로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현리 전투와 유재흥 장군에 대한 이야기가 갑자기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는 쉽게 말해 현리 전투에서 군단장인 유재흥이 먼저 도망쳤고, 그 바람에 군단 전체가 붕괴되어 결국은 작전권마저 미군에게 울며 겨자먹기로 넘겨주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후 유재흥은 정권에 아부해가며 출세를 누렸고 전시작전권 회수 정책에 반대하는 뻔뻔스런 작태를 보였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는 친일파의 존재와 그것을 청산하지 못한 것에 대한 의식, 전시작전권 회수가 이념 문제와 얽히면서 생긴 감정 그리고 군사문화와 국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함께 하고 있다. (역사 청산과 전시작전권 회수 문제에 관해서는 그렇게 강력하지는 못하지만 나름대로 수긍하는 입장이다.)

  물론 그 이야기가 의도적인 과장과 허구로 윤색되어 있다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의 구체적인 진실 여부는 아마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 반대쪽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대개 이런 문제는 그런 것 같다.

  다만 이런 생각을 해본다. 그는 1921년에 태어나 일본군 장교로서 복무 중에 해방을 맞았고, 이념 갈등으로 점철된 해방공간을 거쳐 그리고 전쟁을 맞았다. 지금의 그가 아닌, 그 당시 20대, 30대의 젊은이로서 그가 보는 세상이란 어떠하였을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 반면에 군인으로서의 입신. 그에게 대한민국이란 것이 명확한 의미를 담은 조국으로 가슴에 새겨졌을까? 친일파로서의 행태에 대한 문제는 일단 제외하고, 설사 그가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진심으로 느끼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게 딱히 인간적으로 비난할 거리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이란 것이 몇 년 사이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 시대를 살았던 많은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했으리라.

  또한 그가 30대 초반의 나이에 군단장이 된 것도 시대적인 상황이었다. 워낙 젊었으니 현리 전투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면해주자는 주장이 아닌, 다른 차원에서 하는 이야기이다, 정상적인 군대였으면 잘해봐야 대대 참모 정도나 할 연배와 경력의 사람이 무려 군단의 지휘를 맡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마 당시 초창기를 막 지낸 국군 전반의 축약형이라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모양새가 이러하니 당연히 군대로서의 제 역할을 하기는 어렵고, 그래도 군인으로서의 행동에 힘을 불어넣어 주었던 것은 어렴풋하나마 국가에 대한 어떤 의식과 인간으로서의 오기 같은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군단장으로서 유재흥은 과연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인식하고 또 그걸 제대로 할 수 있었을까?

  그러고보니 현리 전투에 대한 관심은 많았지만, 정작 한 시대를 살아온 인간으로서의 유재흥에 대해 자료를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한번 찾아봐야겠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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