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1. 14.

1940년 전격전(Blitzkrieg) 현상의 원천에 대한 짧은 정리



1940년 전격전(Blitzkrieg) 현상의 원천에 대한 짧은 정리


  근래 1940년 전격전(Blitzkrieg) 현상의 실체와 원인에 대한 새로운 정보들을 접하면서 재미를 보고 있다. 다만 그것과 관련한 정보와 논의들이 기존 전격전의 인식에 대한 비판으로 흘러 그것을 어떤 허상이나 비전통적이고 단순 우연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편향의 함정에 빠지는 것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1940년 5-6월에 나타난 전격전에는 분명 비계획적이고 우연적인 요소가 있지만, 한편으로 기존의 이론과 경험이 뒷받침되어 있기에 가능했던 연속적이고도 복합적인 현상이기도 했다. 그러한 점을 염두하고 전격전을 이루는 요소와 기원에 대해 아는 선에서 간단하게 정리해보려고 한다.

  전격전에 관해서는, 먼저 독일군의 전통적인 전쟁 원칙을 염두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Friedrich) 대왕이 제시하고 그 후 샤른호르스트(Scharnhost), 폰 클라우제비츠(von Clausewitz), 폰 몰트케(von Moltke) 그리고 폰 슐리펜(von Schlieffen)이 계승, 발전시켜 온 전쟁원칙의 요점은 두 가지로, 첫 번째는 적군 전력의 섬멸을 최우선 목표로 하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그 섬멸을 수행하기 위한 방법인 기동전이다. 기동전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포위전으로 여겨졌고, 여기서 집중과 중점(Schwerpunkt)의 이론이 나타났다. 중점은 적군과의 교전에서 가장 우세를 확보할 수 있는 지점으로, 이 지점에 대해 가급적 병력을 집중시키는 것이 기본 원칙이었다. 그리고 여기서는 다양하고 유동적인 상황에 대해 대응하는 지휘관의 유연함이 강조되었다.

  임무형 전술(Auftragstaktik)은 그러한 유연성의 원칙을 실체화한 것이었다. 프로이센군과 독일군에서는 지휘관들에게 상황에 따라 계획을 변경 또는 교체하는 유연성이 요구되었고, 그리고 이것을 충족시키는 최상의 방법은 야전지휘관들에게 모든 수준에서 가급적 많은 자유재량권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전투 계획 과정에서 사단, 연대급 지휘관들에게는 성취해야할 목표가 제시되었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과 방법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은 지휘관 자신에게 주어졌다. 이러한 임무형 전술과 전술적 독립성은 영, 불군의 기계획된  상세한 작전과 하향식 작전명령에 의지하는 체계와 대조적이었고, 프로이센의 여러 전쟁은 물론, 1차 대전에서의 전술급 전투들에서 큰 효과를 보았다.

  또한 흥미롭게도, 1차 대전에서 돌격병(stormtroops) 운용의 원리와 사례는 전격전의 여러 현상적 특징들과 유사한 면이 많다. '충격부대(Stosstruppen)'라고도 불리었던 돌격부대의 운용은 서부전선의 참호전을 타개하기 위해 연구, 도입된 수단으로, 이미 1915년 초부터 나타나 그 해 여름에는 서부전선의 각 군에서 운용하고 있었다. 돌격부대의 운용에서는 기관단총과 수류탄, 경기관총, 박격포 등을 이용한 신속하고 합동적인 화력 운용, 분대와 소대 단위의 독자성과 능동성을 강조한 지휘방식, 적군의 강화지점에 대한 우회와 측면 공격, 종심침투가 중시되었다. 또한 1916년 12월에 지급된 '방어전투요령(Führung der Abwehrschlacht)' 등에서 나타나는 탄성방어(Elastic defence) 교리는, 종심 깊은 방어를 구축하고, 방어선 내부로 진입한 적군에 대해 측면으로부터 우회 공격하여 연대 또는 여단 단위의 적군을 포위 섬멸하는 구상을 제시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전술급에서의 기동전인 셈이었다.  이러한 경험과 연구가 축적되어 1918년 춘기의 대공세에서 독일군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전술적 탁월함을 보여주었지만, 그 한계 역시 분명했다. 전례없이 대규모로 투입된 돌격부대들은 전선 돌파를 달성하고 차후작전을 위해 계속 진격했지만, 보병의 육체적 특성상 전과확대는 극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고 후속 병력과 군수지원의 도착이 지연되어 차후작전은 커녕, 확보한 위치를 적군 예비병력의 반격으로부터 유지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결국 독일군은 정예병력인 돌격병 다수를 상실하고 전략적 성공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격병 운용의 사실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그것에서 장차 전격전의 여러 특성들이 나타남은 물론,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유능한 지휘관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돌격부대의 전투에서 적용되고 발전된 전선 돌파와 종심침투, 신속한 기동, 연속적인 전투 수행 그리고 지휘관의 독립성과 유연성이 보장되는 임무형 지휘는 이후 독일군의 전술에서 중요한 원칙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을 실전에서 경험하고 체득한 롬멜(Rommel) 등의 유능한 지휘관들의 존재 역시 중요하다. 롬멜은 우수한 돌격부대의 지휘관으로서 자신이 체득한 원칙들을 1940년 5월 프랑스 전역에서 전차 지휘관으로서 그대로 적용하여 결과적으로 전격전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당시 롬멜 등의 일선 지휘관들에게 전격전만의 특별한 교리나 원칙은 필요하지 않았고, 이미 경험으로부터 체득한 원칙들을 실천한 것이었다. 여기서 전격전 현상이 교리적으로 1차 대전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수 있다.

  전간기 제국군(Reichswehr)의 참모총장 폰 젝트(von Seeckt)는 1921년에 각서 『우리 군의 재건에 관한 기본 문제(Grundlegende Gedanken für den Wiederaufbau unserer Wehrmacht)』에서 고정된 방어가 아닌, 기동성 있는 공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슐리펜 계획의 실패와 그것에 이은 참호전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이 다름아닌 육군의 비대한 규모에 있다고 판단했다. 육군이 비대해지면 병력의 자질과 훈련 수준은 하락하고 이로 인해 기동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폰 젝트는 비교적 소수의 정예화된, 기동전을 수행할 수 있는 병력의 확보를 추구했고, 이러한 방향은 전차에 대한 관심과 합쳐져 제병합동의 발전으로, 그리고 결국은 전차사단(Panzer Division)이라는 성과를 낳았다. 새로운 전차부대에 대한 인식은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기병의 개념에서 출발하였으나,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병력의 개념으로 점차 발전했다.

  전차사단의 편성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인물은 역시 구데리안(Guderian)이다. 1922년에 차량수송 관련 부서에서 참모장교로 근무하기 시작하면서 구데리안은 전방에서 기동성을 발휘하는 전투부대로서의 차량화보병 개념을 발전시켰으며, 그것은 전차를 주축으로 차량화보병과의 제병합동을 수행하는 부대편제와 기동전 연구로 이어졌다. 이것은 전차에 보병을 종속시킨 개념이었고, 보병 지원용으로 전차를 투입하는 기존의 전차운용 개념이나 서구 기계화전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는 풀러(Charles Fuller)의 기계화부대 개념 - 각각 다양한 역할로 분류되는 전차들만으로 구성된 집단 - 과도 다른 것이었다. 이러한 연구의 종착지인 전차사단은 단순히 전차만으로 구성된 부대이거나 혹은 다른 보병부대를 지원하기 위한 부대가 아니라, 공격과 방어에서부터 전과확대까지 모든 종류의 작전을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정예부대였다. 물론 전차와 전차부대의 사양, 역할, 잠재성에 대한 인식과 발전은 결코 구데리안만의 독자적이고 돌발적인 창안으로 이루어진 건 아니다. 1928년에 이미 제국육군은 전차중대의 창설 계획을 세웠고 1934년 이후로 부대 창설과 연구가 가속화되었다. 구데리안의 회상대로 당시 베크(Beck) 육군참모총장 등의 반대와 방해가 있었다고는 하나, 당시 경제적 상황과 베르사유 조약 체제의 제약을 염두하면, 육군은 전차부대 발전의 추진력을 정책적으로 꾸준히 강화하고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전차사단의 대규모 운용을 통한 작전술급의 기동전에 대해 독일군이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은, 현실적으로 무엇보다도 폰 만슈타인(von Manstein)의 구상에 기인한 것이었다. 1939년 9월의 폴란드 전역에서 전차사단의 기동성과 공지합동의 가능성을 스스로 실천하여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와 독일군 수뇌부는 영불과의 전쟁에서 기동전을 통한 작전술급 성공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기동전의 전통, 뛰어난 야전지휘관들, 전차사단의 존재, 우수한 통신체계의 구축 등 기본적인 여건을 스스로 충족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수뇌부는 1차 대전의 패배의식의 관성과 비관주의, 히틀러 및 나치 체제에 대한 불신, 거의 의도적인 불성실함 등이 묘하게 결합되어 기동전의 부활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전격전의 우연적인 요소가 나타난다. 만슈타인의 구상이 히틀러의 동감을 얻게 된 것은 히틀러의 군사적 재능이나 천재적 영감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공교롭게도 기존의 육군 수뇌부를 따돌리고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히틀러의 정치적 욕망과, 실질적인 군사적 재능과 무관한 도박사적 기질에 기인한 바가 크다. 폰 만슈타인의 작전술적 구상의 과학적 타당성과 거의 무관하게, 그 작전의 규모와 도박적 성격이 지니고 있는 매력이 순간적으로 히틀러를 사로잡은 것이었다. 이 우연적인 선택이 이루어지고 히틀러 본인이 이해하지 못한 구상이 실천되었을 때, 기존의 준비되었던 제요소들이 체계적으로 상응하여 전격전이라는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 참고자료
- 「GERMAN STORMTROOPER」, 『War on the Western Front - In the Trenches of World War I』, Ian Drury, Osprey Publishing, 2007
- 『Panzer Divisions - The Blitzkrieg Years 1939-40』, Pier Paolo Battistelli, Osprey Publishing, 2007
- 『Panzer Tactics - German Small unit Armor Tactics in World War II』, Wolfgang Schneider, Stackpole Books,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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