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6. 8.

신과 종교에 대한 잡담




  거의 매일 저녁마다 같은 장소에서 "구원"에 대한 소리를 듣는다. 웬 아줌마가 그 주변을 돌면서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 게 얼마 전인데, 근래에는 아예 확성기를 들더니 고성방가 혐의에 근접했다. 뭐 사는 데 그렇게 지장이 있을만한 이벤트가 아니니 그러려니 넘기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사람의 존재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게 나름 흥미로웠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다. 참으로 다양한 사람.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은 그렇게 크지 않다. 예전에는 기독교, 아니 좀더 크게 봐서 유신론의 진실성이나 매력을 철저히 부정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생각해보면 그렇게 철저히 부정하려는 태도 자체가 그 종교에 대한 깊은 흥미를 나타내는, 치기어린 표현이었다. 기독교 교리에서부터 창조론에 대한 철저한 공격들은, 그것이 얼마나 논리적으로 철저하게 무장되었는지와 별개로 그 행태의 계기와 에너지의 발원부터가 유치발랄한 역설을 머금은 방어기제, 그것에 다름아니었다. 그 투철하고도 치기어린 적개심에는 어쩌면 신이 존재하고 천당과 지옥이 어디엔가 있을지 모른다는 일말의 회의와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생각해보면 신이 존재하든 말든 어차피 논리적으로 증명될 수 없고 일상적인 감각으로 확인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걸 얼마나 말로 떠들어대든 그게 그리 대수인가 싶은데 말이다.

  사실 나의 성장에 있어서 기독교나 유대교의 정서는 어디에든 편재해 있었다. 국민학교에 들어가기도 전, 아주 어렸을 적에 부모님이 수십 권에 달하는 동화책 시리즈를 사줬는데 개중에 상당수가 성경 속의 이야기였다. 지금 생각나는 제목만 열거해도 아담과 이브, 다윗과 골리앗, 출애굽기, 바벨탑, 삼손과 데릴라, 소돔과 고모라, 예수 그리스도 등등... 물론 그 동화책 시리즈의 전반적인 성격은 한국과 세계의 다양한 민담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개중에 특정 종교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건 오직 기독교의 것들 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어머니나 아버지, 혹은 친척 중에 신자가 있었던 건 아니다. 부모님은 그저 어린이에게는 동화책이 필요하다는 상식을 갖고 적당한 선의 상품을 하나 취해서 던져줬을 따름이다. 동화랍시고 거기에 담겨진 이야기가 얼마나 잔혹하고 광신적인지를 혹 어머니가 확인했더라면 아마 자신의 선택을 두고두고 후회했으리라.

  어디 동화책 뿐이던가. 『벤허』, 『십계』, 『쿠어바디스』. 고대 로마제국과 관련된 영화에서 가장 깊은 감회를 받은 장면은 다름아닌 벤허와 예수가 만나는 장면이었다. 그 인상이 던져주는 묘한 의미와 매력은 『쿠어바디스』나 『십계』 역시 다를 바 없다. 물신과 타락, 폭력을 가득 머금은 거대한 제국 앞에 사랑과 용서, 침묵으로 대응하는 이들의 모습이 던져주는 감화는 "휴머니즘"적일 뿐만 아니라 말그대로 "종교적"이었다. 그러고보면 어떤 점에서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비역사적 미화"의 지적은 다소 부당하다. 역사를 소재로 하는 영상계에서 정말 지독할 정도로 철저히 미화된 건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 아닌가 말이다. 비단 영상물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기독교는 문화적, 이념적, 경제적으로 기득권의 중심부에 가깝다. 한국인이 목사가 되고 한국어 성경을 줄줄이왼다 한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서구와 미국 중심의 문화적 헤게모니의 중핵으로 이 사회에 지배적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기득권이 꼭 비윤리적이거나 부조리하다는 건 아니다. 다만 분명한 건 약자는 아니라는 것이고 그럼에도 현실에서 때때로 약자나 약자의 편을 자처하는 건 그 의도의 진의를 의심하거나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하여간 아마도 그러한 일련의 정서적 감화의 영향 때문이겠지만, 기독교와 관련된 다양한 인상들은 대체로 친숙하다. 심지어 개봉 당시 사디스틱하다는 혹평(틀린 지적은 아니다)을 받았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조차 모든 인류와 역사의 죄를 대신 진다는 초월적인 희생성과 꿋꿋한 모성애의 조화에 묘한 감동을 받았다. 그런 정서가 보다 규격화된 명제와 패턴으로 일상화된다면 그런 게 종교가 되는 것일 게다. 원래 일상문화와 생활습관은 이성적인 이해가 아니라 경험과 정서 그리고 반복과 축적으로 특징지어진다. 어렸을 때의 경험과 충격은 방어기제의 형성과 함께 평생을 간다. 난 지금 레고 장난감을 전혀 갖고 있지 않지만 여전히 레고를 선망한다.

  "그럼에도" 내가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면 그게 거짓말이거나 혹은 자기기만인 걸까? 단순하게 볼 수 없는 이야기이다. 좀더 개념을 좁혀 구체화해서 생각해본다면, 기독교나 이슬람교가 제시하는 신의 존재는 긍정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겠다. 적어도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형태의 신과 구원론은 긍정하지 않는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얘기는 본질적으로 신앙이나 철학과는 거리가 먼, 어찌보면 대단히 상업적인 구호로 보인다. 구원이라는,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종교를 믿는다는 것부터가 수상한 게 설득력이 없다. 그리고 기독교의 신을 진실로 긍정하자면 이슬람교도 긍정하는 게 합리적인데, 이런 전제로 생각하는 것도 꽤나 재미있을 것이다.

  만일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만물과 창조의 궁극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가 있다면? 예전에 신도인 친구로부터 "믿는다고 손해 볼 것 없지 않냐."식의 얘기를 들은 바 있다. 어차피 진위를 증명할 수도 없는데, 믿는다고 무슨 불이익이 있는 것도 아니니 믿어보는 게 어떠냐, 만일 진짜라서 믿으면 천국 가는 건데... 그 때는 발끈해서 무슨 논리적으로 반박을 했던 것 같은데, 하여간 지금 이 말을 생각해보니까 어차피 진위를 증명할 수 없는 거, 신이 존재한다는 전제로 생각해본다면 내 맘대로 신의 성격을 상상하는 것도 아무런 무리가 없겠다.

  뭐 사실 신이 굳이 대단한 인격을 가진 존재일 필요가 있나. 혹은 전지전능한 게 아닐 수도 있다. 구약성경을 보면 여호와는 대단히 잔혹하고 이기적이며 질투심이 많은 신으로 묘사되는데(인간들이 다른 신을 섬기는 걸 끊임없이 경계하는 걸 보면 그렇게 전지전능한 존재도 아니다), 이게 전능하며 한없이 자애로운 신의 설정보다 설득력 있어 보인다. 어쩌면 여호와 자체가 실존하는 신을 가리키는 건 아니더라도 신이 여호와의 성격과 비슷할 수도 있겠다. 생명이나 인격에 무관심할 정도로 냉혹하며 변덕스러운, 하지만 초월적인 능력을 지닌 존재. 혹은 多神이 맞는 걸 수도 있다. 어차피 증명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막연한 상상인데, 신이 꼭 유일무이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더불어 보면 인간의 관점에서 신이 엄숙해보여야할 이유나 의무도 없다. 신은 돼지 몸통에 포경수술을 하고 곤충다리와 염소 머리를 갖고 있을 수도 있다.

  상상이 그저 신 자체의 모습에 그칠 이유는 없다. 어쩌면 우리 인류를 포함한 생명의 존재와 역사는 신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어떤 돌연한 파생물이거나 혹은 제거 대상일지도 모른다. 그 존재가 세상을 창조했다고 해서 꼭 생명이나 인간까지 의도적으로 창조했으리란 법이 있는가. 우리 인간도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의도하지도 않았던 수없이 많은 파생물들을 낳고 있다. 세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그 어떤 궁극적인 의미 없이 우연하게 그리고 불필요하게 생명이 발생하고 진화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생각해도 괜찮은 것 같다. 초월적인 존재가 이 생명과 인간의 역사에 무관심한 게 이상한 것도 아니다. 왜 굳이 초월적인 존재가 짧디 짧은 역사를 지닌 인간 문명의 세계관과 윤리에 종속되어야 하는가. 그 존재에게 우리 인간이나 생명의 존재란 건 그야말로 있으나 마나한, 무관심해도 상관없는 미미한 것이다.  나아가 세계를 창조한 존재의 의도나 계획이 꼭 인간이나 생명을 염두해야할 이유 역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초월적인 어떤 존재가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고 또 언젠가 자신들이 그 존재의 곁으로 가거나 혹은 그 존재가 자신들을 위해 나설 줄 날이 올 것임을 막연히 바라고 있는 건, 그저 미신이라고 웃어 넘길 일은 아니다. 거기에는 분명 어떤 보편적인 동기나 혹은 기제가 있는 것이다. 그건 아마도 "의미" 때문이리라. 의미를 찾는 것. 이 세상이 이런 형태로 존재하고 그 속에서 자신이 살아있는 혹은 온갖 크고 작은 일들로 억압받는 이 현실에 대해 이유를 찾고 의미를 부여하여 자신의 자존감을 보호코자 하는 기제이다. 현실과 맞닿은 온갖 부조리들, 슬픔과 고통, 이 모든 것들에 어떤 본질적인 의미가 없다면, 단지 부조리가 부조리일 뿐이라면 그것도 꽤나 견디기 힘든 일이다.

  실상 객관적으로 보는 세상이란 얼마나 냉혹하고 무의미한가. 삶을 가로막는 공간과 시간, 생각과 현실의 불균형, 구호 아니면 억압기제에 불과한 윤리와 규범, 밑도 끝도 없이 거대한 세계가 내리누르는 가운데 저마다 살고자 발버둥치는 곳, 그러한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아무 의미없이 홀로 내던져진듯한 존재. 이러한 세상과 존재에 그것을 구조화한 초월적인 존재와 힘 그리고 원리를 부여하는 일은 대단히 유의미한 것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오늘날은 대중화된 자연과학이 이러한 종교의 역할을 어느 정도 잠식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사건을 보라. 대중 속의 개개인이 자연과학을 이루는 체계와 원리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해도 자연과학이 제시한 강령과 이미지는 사회적으로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

  생각을 쓰다보니 어쩌다가 종교와 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방향이 되었는데, 내 생각이 느슨한 것일 뿐이지 그래봤자 나는 현실에서 무신론과 진화론을 지지하는 편이다. 저마다 신이나 어떤 권위에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건 나름의 생활문화로 존중할 수 있겠지만 그게 타인의 생활영역을 침해하거나 혹은 정치, 과학 등에 힘을 뻗기 시작하면 경계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진화론을 비롯한 과학적 영역(인문과학까지 포함해서)에 대한 종교의 간섭은 그 자체가 비과학적이기에 당연히 비생산적일 뿐만 아니라 그 특유의 자기중심성을 보면 무례하기까지 한 것이라고 본다. 자연과학이 대중에게 강령과 같은 기능을 한다 한들 그렇다고 자연과학 스스로가 종교처럼 막연한 추상을 강령화하여 본질을 왜곡하거나 숨기지는 않는다. "예수천국 불신지옥" 구호를 복음이라고 믿는 사람은 있겠지만, 듣는 사람에 따라서 그건 타인의 문화와 존재를 무시하는 저주가 될 수 있다. 이건 흔히 말하는 몇몇 사이비 종교나 광신도에 한한 문제가 아니다. 소위 사이비 종교나 기독교나 이단이나, 본질적으로는 다를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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