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5.

『하이데거와 나치즘』



『하이데거와 나치즘』


  사실 하이데거와 같은 철학 분야에 대해 무식한 입장에서 고작 관련 도서 하나 읽었다가 주관을 거론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겠지만, 그럼에도 나름대로 깊은 감동과 인상이 있었기에 조금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붙이련다.

  하이데거의 나치즘 동조에 대한 처음의 생각은, 현실적으로 나약한 지식인으로서 압도적인 구너력의 힘 앞에 좌절하거나 혹은 일종의 출세욕망으로, 다시 말해 기회주의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지식인에 대한 다소의 회의적인 편견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혹 나치의 선전에 말그대로 이성이 마비되어 혹했다고 생각해보는 것도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존재철학과 근대기술문명에 대한 비판적 입장의 연속선상에서 나치에 동조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당대의 인문철학적 경향과 보수적 전통에 대한 설명을 읽고 과연 그럴 수도 있겠다 납득했다. 정확하게 동일한 것은 아니겠지만, 나 역시 한때 존재의 의미와 관련해 현실의 꽉 짜여진, 마치 거대한 기계의 일부로 전락한듯한 인상에 대해 어떤 막연하면서도 깊은 회의와 무력감에 빠졌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 질풍노도의 시기에 걸맞는 - 다소의 치기어린 막연한 회의감과, 철학자의 깊고도 체계적인 사고가 상호 동등한 것일리는 없겠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는 정서적이고 논리적인 연결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좀더 무리하게 일반화한다면,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및 자유시장 체제 속에서 생활하면서, 종종 느끼는 혼란, 소외, 고립감, 공허함 등의 의식은 그것이 꼭 하이데거의 그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현 체제와 그것이 담지하는 가치들에 대한 회의를 불러 일으키곤 한다. 지금 존재하는 혹은 행동하는 있는 이것이 진정 과연 어떤 의미를 위한 것인가, 도대체 왜 끝도 없이 욕망하고 그것을 위해 행동해야 하는가, 그 목적과 끝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할 때 문득 덮쳐오는 허무함과 위기의식은 개인적 자존감과 자유, 평등 등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환멸과 비관으로 이어진다. 아마도 하이데거의 시대는 근대기술문명의 진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반동적 보수주의의 사조가 있었기에 그것이 나치즘으로 귀결되어 일종의 사회운동이 될 수 있었지만, 역사의 과오로 확인된 파시즘의 가치를 전면적으로 경계하는 우리 시대에는 딱히 이렇다할만한 대안적 가치나 모델이 부재하기에, 그 심각성에 비해 공론화 자체가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오늘날은 좌우를 막론하고 현실정치세력들은 민주주의 가치와 물질적 풍요를 강조하고 있고, 이러한 정치지형에서 삶의 어떤 궁극적인 의미와 가치의 문제는 들어설 곳이 없는 것이다. 아니면, 혹 어쩌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새로운 또다른 형태의 전체적 가치와 질서가 등장하는 것은 아닐까?

  하이데거는 근대에 관한 자신의 입장에 대해 단순히 환멸과 좌절로 환원하지 않고 현실에서의 대안을 탐색하다가 나치즘에서 가능성을 보았던 모양이다. 나치즘에 대한 하이데거의 동조 그리고 단절의 과정과 그 논리는, 나치즘에 관하여 그저 시대적 상황에 따른 또는 권력장악을 위해 필요한 온갖 임시변통의 논리조합 정도 여기던 나의 입장에서 나치즘의 어떤 철학적 뿌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였다.

  하지만 초기 나치즘에 대한 하이데거의 동조에 대해 사상적으로 탐색하는 것이 이후 그 과거에 대한 하이데거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성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그 태도는 실망과 환멸을 불러일으킨다. 홀로코스트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는 하지만, 그 사태를 잠재하고 있던 현상에 대해 동조하고 특히 명확한 반유대주의 선전과 정책에 대해 침묵하고 있던 것은 어떤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반성을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닌가? 홀로코스트 문제에 관해 스탈린과 소련군의 만행문제는 왜 문제시하지 않는가의 반문을 처음 접했을 때의 솔직한 느낌은, 정치적이면서 치졸한 대응이라는 인상이었다. 설사 그의 철학적 입장에서 홀로코스트가 본질적으로 나치즘만의 특이현상이 아니라고 전제한다해도, 그러한 인간적 파탄에의 직접적인 대면이 그의 철학에 어떤 변화의 계기가 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주관적인 단정이지만 결국 하이데거는 나치즘 현상에 대한, 개인적이고 또 역사적인 차원에서도 반성적 대면을 회피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태도가 과연 자존심의 문제였는지 아니면 충분한 철학적 고민의 결과였는지 몰라도, 이러한 인상은 하이데거의 성격과 의식 대해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이 책을 통해, 지식인이나 학자의 정치참여 또는 권력과의 연결을 단순한 일탈이나 이기적인 욕망의 발현으로 치부하는 편견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를 느낀다. 학자의 현실참여가 학자적 태도의 연장선상에 있을 수 있음은, 그 각각의 참여에 대한 찬반과 별개로, 그 현상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가능성이다. 설사 내가 찬동하지 않는다하더라도, 어떤 지식인의 현실참여를 단순한 이기심이나 착각의 소치 정도로 치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같은 관점에서 일제시대 지식인들의 태도와 이른바 "변절"에 대해서도 그것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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