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2. 26.

영화 『마이웨이』 - 소재가 아깝다



영화 『마이웨이』 - 소재가 아깝다




  근래 일본 전쟁영화들의 문제점이란 무엇일까. 단순한 소비자의 입장에서 특별한 지적을 할 수는 없지만, 그 영화들이 전쟁이라는 소재를 피상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줌은 확실하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끔찍한 전쟁의 중심이자 주인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 나타나는 전쟁의 부조리에 대한 인상은 희한할 정도로 피상적이고 막연하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마치 남의 일을 말하는듯한 느낌이다. 그 거대한 부조리극에 관해서 일본인들에게는 직접적인 경험과 감상들이 한없이 많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전쟁영화는 군함매니아의 취향이나 혹은 의리와 용기라는 남성적 가치의 과시, 때로는 SF 애니메이션적인 상상으로 채워진다. 영화는 전쟁에 대한 부정적인 감상을 교훈으로 제시하지만, 그 설명방식은 평면적이고 심지어 동화적이기도 해서, 그 교훈이 본래 가져야할 심각성과는 거리가 멀고 심지어 유치할 정도이다. 일본인들이 전쟁영화를 만들 때 그들 본인의 경험과 감상을 솔직하게 담지를 못하고 온갖 미적 취향과 클리셰들, 유치한 상상으로 내용을 채우는 건 기묘한 일이다. 근래 일본군을 주인공으로 한 전쟁영화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은 단연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였다. 미국인이 발굴하고 묘사한 영화 속의 일본군은 가장 사실적이면서 또한 교훈적이었다.

  『마이웨이』도 비슷한 경우로 보인다. 일단 기반이 된 소재의 핵심 자체는 훌륭했다. 전쟁과 인간 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부조리한 희비극의 정수라고 할만하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그 소재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 심지어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조차 전혀 모른다. 그런 게 당연한 것이, 애초에 만주나 소련에서 고군분투한 조선인의 존재와 경험은 대한민국의 공동기억과는 무관하다. 소련에서 조선인들이 어떤 경험을 했는지 우리는 관심이 없었고, 그저 피상적인 동정 혹은 적대시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우연히 발굴되어 퍼져나간 조선인 포로의 짧은 이야기에 사람들은 열광을 했고, 그걸 상업적으로 이용하고자 영화가 급조된 것이다. 제작기간이 몇 년이고 선전해봐야, 이런 결과물에서는 그 제작기간이 소재의 질적 승화와는 관계가 없었다고 봐야 한다.

  그 주인공의 경험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으니, 영화를 채우기 위해 가져올 내용이 없고, 그렇다고 상상을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다(상상이란 것도 근본적으로는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결국 영화의 내용은 어디선가 가져온 것들로 채워지는데, 게다가 그것들이 이미 전형화된 것들인지라 식상함을 피할 수 없다. 주인공의 성격과 행동방식은 그 시대상을 반영하는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하고, 역시 식상할 정도로 전형적인, 의리와 용기를  - 물론 한국인답지 않은 외모까지 -  겸비한 '멋진 사나이'의 이상을 반영할 뿐이다(재미있는 것은, 그 시대상을 제대로 소화하여 보여준 조연급 캐릭터가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동일한 외모와 남성성으로 치장했던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는 하여간 형제애와 분단 및 전쟁의 비극이 조화를 이루었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 정도의 미덕조차 찾을 수 없다. 주인공의 존재와 특별한 맥락을 갖지 못하는, 기시감으로 채워진 영화 속의 전쟁은 그저 과도한 포장으로만 보인다.

  하지만 단순히 비난만 하기에는, 아쉬움이 너무 크다. 이런 소재를 제대로 다룬다면, 그 실제 주인공의 경험을 어떻게 살려낼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하는 게 먼저였다. 설사 그 직접적인 경험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더라도, 최소한 러시아 내 고려인들 - 우리가 찾는 그 사건의 진정한 주인공이다 - 의 유사한 경험이라도 조사해서 상상의 기반을 확보해야 했다. 돈과 시간이 문제라면, 차라리 배역을 유연하게 조정하고 장면의 규모를 줄여서라도 내용을 추구해야 했다. 굳이 탱크와 폭격기가 나오지 않아도, 그 소재의 매력에는 특별한 하자가 없을 것이다(『유로파 유로파』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언젠가 이 소재의 무한한 잠재성을 제대로 살려줄 작품이 나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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