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3. 25.

"모릅니다" "아닙니다" "잘 못 들었습니다"



"모릅니다" "아닙니다" "잘 못 들었습니다"


  군대에서 익혀야할 습관 중에 이른바 "다.나.까"라는 게 있다.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말을 할 때는 무조건 "다" "나" "까" 중의 하나로 끝나는 정중한 표현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하면서도 은근히 적응하기 힘든 규칙이었는데, "다.나.까"의 형식에 집착하다보니까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상급자의 요구로 하급자가 자신의 주관을 표현하거나 상급자에게 무언가를 요청해야 할 때는 무엇이라고 어떻게 해야 하나? "~인 것 같습니다", "~해주실 수 있습니까?" 같은 길고 긴 말을 써야 하는데, 재미있는 건 이것마저도 무례하다는 비난을 듣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상급부대에서 묘한 명령이 하달된 적이 있는데, "모릅니다", "아닙니다"와 "잘 못 들었습니다."라는 표현을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상급자에게 무례하다는 이유이다. 상급자의 말씀에 대해 하급자가 감히 "모른다", "아니다", "잘 못 들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괘씸하고 시건방지다고 여긴 모양이다. 문제는 하급자가 그런 말을 써야할 상황이 흔한데, 그런 경우를 위한 표현이 무엇인지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나마 제시된 것이 "죄송합니다만, 다시 한번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라는 어마어마한 표현이었다.

  물론 이 규칙은 얼마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현실에서 너무 불편한 규칙이었기 때문이다. "모른다", "아니다", "다시 말해달라"는 실용적이고 단순한 의도의 표현이 막혀버리거나 길게 늘어지는 형식으로 규정되니 말하는 이나 듣는 이나 좋을 리가 없었다. 대화를 하다가 대하사극을 찍을 판이었다. 결국 자연스럽게 모든 건 원래로 돌아갔고 "아닙니다"는 평이하고 편리한 표현이 되었다.

  사회에서도 그렇지만 군대에서도 언어란 중요한 규율 중의 하나일 것이다. 통일성, 절제, 복종 등의 규율을 체득함에 있어 제식훈련과 마찬가지로 언어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규율의 엄함도 정도껏이어야지, 일상이 요구하는 의사소통을 막아버리면 어쩌라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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