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 15.

국산 RTS 『쥬라기원시전』 (1996)

국산 RTS 『쥬라기원시전』 (1996)


  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 패키지 RTS 게임이 크게 유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당시의 웬만한 이름 있는 개발사나 신생회사들은 RTS 게임을 제작했던 것 같은데, 물론 그 중 대개는 어딘가 심각한 결함을 지닌 게임들이었다. 게임의 진행을 방해하는 버그는 두말할 나위가 없고 난이도는 극도로 높았다. 종족 간의 밸런스와 같은 문제점은 아예 논외로 치는 게 편하다. 하지만 일단 그러한 완성도 문제를 제쳐두고 보면, 적어도 초창기에는 괜찮은 아이디어와 개성들이 돋보이는 작품들도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쥬라기원시전』이다.

  이 게임을 처음 접한 것은 『게임피아』부록으로 제공된 공짜 게임 덕분이었다. 당시 내가 게임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잡지였고, 물론 게임이 들어 있는 부록CD도 탐이 나는 것이었다. 그 시절에 잡지를 사면, 정말 농담빼고, 게임 리뷰와 공략 기사는 물론 광고까지 빠짐없이 모조리 읽었다. 지금 보면 정말 유치하고 뭔가 엉성한 광고도, 그 시절엔 보기만 하면 마음이 두근거렸다. 요즘이야 인터넷에 정보가 너무 많아서 문제인데, 그 때에는 게임 정보가 정말 희소했기 때문이다.

 


  제목이나 메뉴 화면에서 보여지듯이, 이 게임은 영화 『쥬라기공원』으로부터 적어도 외형적인 영향을 받았다. 물론 게임의 내용 자체는 서로 거의 무관하고, 좀더 비판적으로 보면 이 게임은 쥐라기 시대와 그렇게 깊은 관계가 아니다. 공룡을 포함한 선사시대 짐승들과 원시인, 마법사가 공존하는 일종의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물론 그 영화 덕분에 형성된 "쥬라기" = "공룡" 이라는 연상만은 납득이 된다. 대단한 영화였다.





  이 게임은 종족이 무려 8개이다. 카누스, 코아카, 라둠바, 로메크, 티라노, 마사이, 무스펠. 쿰바. 각 종족의 특징을 꼽아보면, 카누스는 방어 마법, 코아카는 익룡, 로메크는 라둠바는 활, 로메크는 순간이동, 티라노는 공룡, 마사이는 공격력, 무스펠은 공격 마법, 쿰바는 방어력이다. 다만 각 종족은 특징적인 유닛을 겨우 1, 2개 가지고 있을 뿐이고, 마법 유닛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유닛들은 사실상 기능이 동일하다. 공룡 유닛 역시 대부분이 동일한 기능을 갖고 있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건, 게임 화면에서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부조가 자주 나온다는 것이다. 뭔가 고대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을 잘 활용한 것 같은데, 다만 그 주위의 그림들이 유치하다는 게 흠이다. 하지만 그 시절에 저 정도의 그래픽은 잘 나온 편이다.





  이 게임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자원과 유닛의 능력치 상승 개념이다. 자원은 이른바 "먹거리"로, 주변의 동물을 사냥하여 얻는다. 유닛은 먹거리를 모아서 갖고 다니며 체력 회복에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먹거리를 저장소에 모아놓으면 그것을 자원삼아 건물이나 유닛을 만들 수 있다. 주변에서 동물은 끊임없이 출현하기 때문에 자원의 제한은 없다.

  또한 유닛은 동물이나 적 유닛을 죽일 때마다 능력치가 상승한다. 상승시킬 수 있는 능력치에는 공격력, 방어력 등등 유닛의 모든 능력이 포함되며, 상승시킬 능력치의 종류를 유닛별로 설정할 수 있다. 능력치의 상승 가능한 폭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사실상 이것이 전투의 승패에 관한 최대의 관건이다. 능력치 최저의 유닛은 최고의 유닛에게 거의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게임의 난이도를 결정하는 요인이다.




  또 한 가지 특징을 꼽자면, 유닛이 무기를 선택하여 장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장간에서 무기를 생산할 수 있고, 유닛이 죽으면 장비했던 무기가 땅에 떨어져서, 그것을 다른 유닛이 주워서 장비할 수 있다. 지금의 기준으로는 쓸데없이 번거로운 작업 같아 보이지만, 어쨌거나 나름 신선한 개념이었다. 다만 무기가 아무리 좋아도, 능력치의 큰 격차를 뒤집는 것이 보장되지 않는다. 그만큼 능력치 격차가 커질 수 있다.




  이 정도의 특징들을 제외하면, 게임은 그렇게 두드러진 장점은 없다. 유닛들의 이동은 답답하고 소리는 "우가우가"와 짐승의 괴성 정도이다. 지형은 평탄하며 다만 전진을 방해하는 효과가 있긴 하다. 싱글플레이의 구성은 대체로 평이하여, 사냥을 하다가 적군과 대판 싸우고 이기면 된다. 이 패턴의 게임을 모든 종족이 반복한다.

  무엇보다 가장 끔찍한 것은 전반적인 난이도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는데, 일단 앞서 언급한 능력치의 격차 문제가 크다. 적군은 초기부터 대단히 높은 능력치의 유닛을 보유한 반면에, 아군은 열심히 사냥해서 능력치를 높여야 한다. 웬만한 유닛의 조합과 물량으로 이러한 격차를 극복하기가 어렵다. 능력치 격차를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사정거리가 긴 유닛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고 적군 유닛을 유인하여 집중 사격으로 죽이는 것이다. 그러니 사정거리가 긴 유닛을 확보하기 어려운 종족은 그만큼 난이도가 높다.

  게다가 적군의 행동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아군 유닛이 적군 건물을 공격하면, 그 즉시 모든 적군 유닛들이 그 아군 유닛을 잡기 위해 달려든다. 더 재미잇는 건, 그 아군 유닛이 사망하면, 모든 적군 유닛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이동을 멈춘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적군 건물을 조금씩 파괴하여 전세를 뒤집는 작전을 이용하기가 어렵다. 아니, 애초에 이 게임에서는 유닛의 물량보다 능력치가 훨씬 압도적인 요인이기 때문에 생산을 방해한다는 게 큰 의미가 없다.

   또한 적군의 저장소 내의 먹거리가 모두 바닥나면, 적군은 모든 유닛을 동원해 총공격을 한다. 적군은 사냥은 하지만 먹거리를 좀처럼 모으지 않는다. 그 이전에 아군이 유닛의 능력치를 충분히 키워놓지 않으면 상당히 위험할 수 있는데,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게 총공세를 하던 적군이 일순간 갑자기 모든 행동을 중지한다. 그러면 적군 유닛을 조금씩 유인해서 각개격파하면 된다.

  이 게임을 효과적으로 즐기는 방법은 다름아닌 치트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치트를 사용하면 유닛의 능력치를 최대로 높일 수 있었고, 그걸로 게임의 난이도는 사실상 끝이었다. 다시 말해, 이 게임을 적당한 난이도로 즐길 수 있는 정상적인 방법이 별로 없었다.

  


  이 게임이 과연 잘 만든 게임인가를 따져보면, 아니라고 대답하는 게 솔직하다. 앞서 언급한 요인들로 인해 반복적인 행동을 요구하면서 난이도는 너무 높고, 반면에 각 임무의 보상이라는 걸 느끼기 어렵다. 이번 임무에서 노력과 시간을 들여 유닛의 능력치를 높여봤자 그 임무가 끝나면 그러한 투자가 무위로 돌아가고, 다시 처음부터 반복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이 게임을 유난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역시 그 독특함 때문이다. 그 이후의 국산 RTS 게임들이 대체로 북미 게임들의 아류 수준이었음을 염두하면 더욱 그렇다. 적지 않은 수의 국산 게임들이 특정한 인기 게임들의 아류 수준으로 제작되면서도 게임 자체로도 혹평을 피하지 못했다. 반면에 적어도 이 게임은 개성적이기는 하다.

  극히 주관적이지만, 이러한 독특한 게임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그 분야의 비교적 초창기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직은 시장의 경쟁작들을 크게 의식하지 않고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떠올리고 실현하려는 노력이 가능하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종족을 8개씩 만들고 능력치의 폭을 극단적으로 설정한 것 등이 그렇다. 이러한 시도를 해도 나름 재미를 추구할 수 있음을 생각했을 것이고, 한편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게이머들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유행의 대세가 정해지고 인기작과 비인기작의 격차가 커지면서, 거의 모든 게임들이 성공 사례의 끄트머리라도 좇기 위해 천편일률적인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외국산 게임에 맞추어진 소비자들의눈높이를 의식하여 그것을 조금이라도 따라잡기 위한 노력은 결국 모방 혹은 표절이었고, 그러한 수준에 있을 때에 시장이 끝장나면서 국산 RTS에의 기억은 그렇게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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