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2.

故 황장엽, 『개인의 생명보다 귀중한 민족의 생명』



故 황장엽, 『개인의 생명보다 귀중한 민족의 생명』


  故 황장엽의 글을 처음으로 읽은 것은 군대에서였다. 내무실에서 뒹굴던 책들 중에 황장엽의 회고록이 있기에 살짝 보았는데 나름 당기는 재미가 있어서 끝까지 읽었던 것이다. 그 책이 혹시 군대의 정신교육 차원에서 배포된 것인가 싶기도 한데, 사실 내용상으로 보았을 때는 그렇게 유용한 정신교육 교재는 아니었던 것 같다.

  회고록에서 전반적으로 느낀 것은, 일단 황장엽은 김일성을 옹호하고 김정일을 부정한다는 점 그리고 그의 사상이 그 명성에 비해 너무 막연하면서도 조잡하다는것이었다. 전자의 경우는 북한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오랫동안 많은 경험을 해왔던 당사자의 솔직한 개인적 감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데, 후자는 은근히 기대했던 것과는 달라서 왠지 더 실망스러웠다. 그가 주장하는 철학이란 것은 날카로운 분석이나 신선한 면모가 없었고 사변적인 원칙의 나열에 불과해 보였다.

  이후에 읽은 『개인의 생명보다 귀중한 민족의 생명』은 그나마 황장엽이라는 인물에 대해 좀더 접근한 계기였다. 여러 글에서 황장엽은 북한의 현실과 모순에 대해 좀더 구체적이고 근본적인 비판을 제기하며 김정일에 비해 김일성을 옹호하는 면도 보이지 않는다. 북한의 주체사상에 대해 논리적인 비판을 하고 또한 북한의 개혁과 대안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한다.

  여기서 나타난 황장엽은, 철학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사상가 아니면 정책가이다. 그 점에서 보면, 왠지 황장엽은 북한에서 했었던 역할을 한국에서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혹은 현실적인 상황과 별개로 그런 역할을 하는 것에 익숙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북한 개혁의 전망과 경제, 정치, 사상에 대한 전방위적인 분석과 대안들은 현실정치의 원칙 또는 정책을 공적으로 제시하고 싶은 그의 욕망을 보여준다.

  물론 그의 주장들은 실용적이고 구체적이기보다는 여전히 막연한 원칙의 단순반복에 가깝기는 하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체득한 입장에서 보면 그의 정치적 분석과 주장은 원칙적인 사항들을 무의미하게 나열하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정치적 주장들은 구체적이고 치밀한 논증을 결여하고 있으며 부분과 전체의 조화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딱히 이렇다할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게다가 대안적 정치체제 논의에서 "사상권"을 제기한 것은 민주주의 체제가 감당해야하는 분열의 조짐을 근본적으로 봉쇄해야 한다는 주장이고, 솔직히 평가하면 전체주의 체제를 지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마찬가지로 책의 제목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황장엽은 아마도 개인주의보다는 전체주의를 지향하는 것 같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아마 그는 민주주의자라기보다는 민족주의자에 가까울 것이다. 그의 글에서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묘한 이질감은 여기서 기인한다. 오늘날에 정치사회문제를 논의하면서 민족을 그 중심에 놓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통일 논의가 점차 사라지는 지금에 그의 이러한 민족주의가 현실에 적합하지는 못할지라도, 그의 주장은 기만적인 이기심이 아닌 솔직한 자신의 심정이자 열정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남북한 전체를 통틀어 진정으로 언급될 수 있는 마지막 민족주의자이자 통일주의자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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