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5. 23.

『TOAW3』 - 「Road to Moscow 1941 II - Smolensk」



『TOAW3』 - 「Road to Moscow 1941 II - Smolensk」


시나리오 디자이너 : Robert Kunz 




  1941년 7월 4일, 스몰렌스크 방면. 헥스 규모는 10km이고, 턴 규모는 1일이다. 부대 단위는 연대/사단급이다. 스몰렌스크 전투를 소재로 하지만, 실제로는 레펠-스몰렌스크-비야즈마-모스크바로 이어지는 광대한 전역이다.

  독일군의 초기 병력은 주로 전차사단과 차량화사단이며, 턴이 진행되면서 보병사단들이 후속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일단은 보기에는 모든 것이 막연해 보인다. 소련군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고, 전역의 넓이에 비해 병력은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모든 것을 기갑병력의 기동력에 걸기로 결심하고, 스몰렌스크를 중심으로 한 거대한 포위망을 구상했다. 북익은 데미도프-비야즈마 선으로 전진하고 남익은 로슬라블-우그라 선으로 전진하여 스몰렌스크 일대의 소련군을 전부 포위할 생각이었다.

  과감하긴 했지만 현실성이 없었고, 결과적으로도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일단 도로가 충분하지 않았고 소련군의 저항 역시 그러한 단선적인 작전을 허용하지 않았다. 물론 그런 구상이 초기에 여러 병력의 전진 방향을 결정하는 데 방침의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완전히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곳곳에서 동시에 소련군과 접촉하면서 상황이 좀더 구체화되었다.  서 드비나 강과 드네프르 강을 향해 전진하면서 부딪힌 소수의 소련군병력을 섬멸했고, 한편 센나 방면에서 소련군 기계화군단이 역습을 시도하였기에 정면 공격을 피하면서 포위를 구상했다.

  서 드비나 강을 도하하여 7월 8일에는 폴로스크 요새를 성공적으로 포위했고 그 방면의 소련군 제22군을 압도적인 열세로 몰아넣었다. 그 동남쪽의 울라에서 도하한 3개 전차사단이 서드비나 강 북안을 따라 전진했다. 한편 그 남안에서는 1개 전차사단이 비테브스크를 포위하는 양상을 취하며 동쪽으로 전진했다.

  보다 남쪽의 모길레프 방면에서는 도시를 방어하는 소련군과 접촉하면서 남쪽으로 우회하여 드네프르 강을 도하할 것을 결심했다. 로가체프 방면에서는 제3전차사단을 주력으로 한 병력이 이미 7월 6일에 드네프르 강을 도하하고 소련군을 밀어내며 포위섬멸과 고멜 점령을 구상했다.





  폴로스크의 북쪽 그리고 센나 방면, 드네프르 강 동안에서 각각 소수의 소련군 병력을 포위섬멸하고 진로를 개척하기는 했지만, 상황은 여전히 불분명했다. 비테브스크 방면에서 대규모의 소련군 병력이 방어와 역습을 해오면서 일시적으로 전선의 붕괴를 염두해야 했다.

  그 상황을 반전시킨 것은 역시 기갑병력의 기동력 그리고 교량공병의 도하능력이었다. 7월 12일경에 벨리즈의 동쪽과 서쪽에서 약간의 시차를 두고 제12, 7, 20전차사단이 각각 서 드비나 강을 도하, 남진하여 소련군의 교통선을 차단하는 구도를 만들었다. 이것이 시나리오의 진행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었던 것 같다. 원래 구상했던 포위망만큼 거대하지는 않았지만, 지형지물을 이용한 보다 현실적이고 명확한 의도의 포위섬멸이었기 때문이다.

  보다 남쪽의 드네프르 동안에서는 상황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 모길레프를 우회하여 도하한 SS 다스라이히 사단과 제4전차사단은 역시 적군의 교통선을 차단하고 동진하려는 의도였는데, SS 다스라이히 사단은 모길레프의 후방을 차단했지만 사실상 적군에게 노출된 상태였고 동진하려 했던 제4전차사단은 슬라브고로드에서 고착되었다. 시나리오 종료까지 SS 다스라이히 사단이 예하 연대를 전혀 상실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운이었는데, 거의 10일 동안 여타 아군 부대와의 접촉없이 단독으로 전투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로가체프 방면에서는 제3전차사단과 제1기병사단이 소련군을 일시적으로 포위했지만 병력이 부족하여 아슬아슬한 상황이었고 결국 포위망은 해체되면서 오히려 열세로 몰렸다.

  레펠의 동쪽에서는 역습을 감행하던 소련군 제5 기계화군단을 포위하였다. 보다 북쪽의 폴로스크 요새는 함락되었고 제19전차사단이 벨리키예 루키를 향해 전진했다. 이 방면에서는 소련군의 저항이 심하지 않았다.



  비테브스크-스몰렌스크 도로 상의 소련군, 특히 제19, 20군이 거의 포위섬멸되면서 스몰렌스크 방면은 아군의 우세가 확실시되었다. 하지만 스몰렌스크의 점령 자체보다는 동쪽으로의 전진과 남쪽 방면의 소련군 포위섬멸이 중요했기 때문에 오르샤-스몰렌스크 선의 드네프르 강 도하를 준비했다.

  남쪽의 전세는 좀더 호전되었다. 후속 보병사단들이 도착한 것이다. 모길레프의 소련군은 서쪽으로는 보병사단들, 동쪽으로는 SS 다스라이히 사단에 의해 포위되는 양상이 되었다. 로가체프 방면에서는 제3전차사단의 전선을 보병사단이 교대하고 전차사단은 안전한 후방인 로가체프 북쪽에서 휴식하면서 드네프르 강 도하로 소련군의 후방으로 침투할 구상을 했다.
 



  7월 18일-20일에 걸쳐 제7, 10, 17전차사단이 드네프르 강을 도하하여 동진했다. 이 도하작전은 원래 스몰렌스크를 포위하면서 동시에 고르키 방면에 존재할 것으로 예상되는 소련군의 교통선을 차단하기 위한 의도였지만, 아쉽게도 그 방면에는 몇 개 포병부대 이외의 소련군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몰렌스크를 포위하는 목적은 달성했다.

  북쪽에서는 기갑병력이 야르체보를 향해 동진하였는데, 역시 소련군 칼라닌 집단과 접촉했다. 벨리즈와 데미도프 방면의 고립된 소련군 소탕과 스몰렌스크 점령은 후속하는 보병사단의 몫으로 예정되었다.

  모길레프에서는 복잡한 구도가 만들어졌다. 모길레프 방면의 소련군은 포위되어 있었지만, 동시에 그 동쪽의 SS 다스라이히 사단도 동쪽으로부터 역습해온 소련군 제13군에 의해 거의 포위된 양상이었다. 슬라브고로드 방면에서는 여전히 제4전차사단이 고착되어 있었다.

  로가체프 일대의 상황은 완전히 호전되었다. 후속한 보병사단이 소련군의 정면을 고착시키고, 그 동안에 드네프르 강을 도하하여 우회 전진한 제3전차사단이 소련군의 후방까지 침투하여 결국 포위를 완성했다. 또한 쉬로빈의 서남쪽에서도 소련군 기병군단과 소총사단의 교통선을 차단하였다. 소련군 제21군 거의 전부가 포위되었다.

  한편 최북단에서는 제19전차사단이 거의 무인지경으로 달리면서 벨리이를 향해 접근했다.




  7월 21일에 야르체보 방면에서 제12전차사단이 소련군 칼라닌 집단을 북쪽으로 우회하여 드네프르 강을 도하했다. 물론 목표는 칼라닌 집단의 교통선 차단이었다. 23일에 사포노보를 점령함으로써 목표는 달성되었다.

  한편 스몰렌스크 남쪽의 기갑병력은 옐나 ,도로고부즈, 로슬라블을 향해 분산하여 전진하였는데, 단순한 전과확대만을 추진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기였던 것 같다. 도로고부즈 방면에서는 소련군 제24군과 접촉했고 로슬라블 방면에서는 소련군 카찰로프 집단과 접촉했다. 스몰렌스크에서는 소련군 제19군에 대한 포위전투 중이었다.

  모길레프의 소련군은 23일에 포위섬멸되었고, 소련군 제13군의 공세를 어렵게 저지한 SS 다스라이히 사단의 상황도 제9군단과 접촉하면서 크게 개선되었고, 공세로 전환할 준비를 했다. 크리케프의 북쪽에서는 소련군 제4군과 접촉했다.
 
  그보다 남쪽에서는  7월 22일에 슬라브고로드의 남쪽에서 제3전차사단이 소즈 강을 도하하였고, 이어 보병사단들이 후속했다. 목표는 크리케프-로슬라블-키로프 선으로 전진하여 그 북쪽의 소련군의 교통선을 차단하고 대규모 포위섬멸 양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7월 21일에 벨리이 방면에서 소련군 제30군과, 23일에는 제29군과 접촉하였다. 일단 제30군을 벨리이 동쪽에서 고착시키고 제29군을 포위섬멸한다는 구상을 했다. 7월 23일에 최북서부 지역에서 새로운 소련군부대가 등장하자, 벨리키예 루키 방면의 방어를 위해 보병사단 1개를 북쪽으로 전환했다.



  벨리이의 서쪽에서 제19전차사단과 차량화보병이 소련군 제29군을 분단, 포위하였고, 그보다 남쪽에서는 제18전차사단이 단독으로 드네프르 강을 도하하여 비야즈마로의 도로로 진입했으나 미상의 소련군 보병사단과 접촉했다.

  이 때 가장 빠르게 진행되었던 것은 남쪽에서의 진격이었다. 제3전차사단은 적의 방어를 우회하며 계속 동진하여, 결국 7월 28일에 로슬라블 인근에서 제17전차사단과 접촉하여, 소련군 제4, 13군, 제4공수군단과 카찰로프 집단에 대한 포위망을 완성하였다.

  북단에서는 벨리키예 루키 방면에서 제6보병사단이 소련군 제22군과 접촉하였으나, 큰 위협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7월 29일과 30일에 벨리이 인근에서 소련군 제29, 30군이 포위섬멸되었다. 

  8월 1일에 비야즈마 남쪽에서 아군 기갑병력이 도달하면서 사포노보-비야즈마 선의 도로 일대에서 소련군 제24, 32군이 포위되었다. 같은 시기에 야르체보 방면의 칼라닌 집단 역시 전투력을 상실했다.

  남쪽에서는 제17전차사단이 스파스-데미얀스크로, 제3전차사단이 키로프에 육박했다. 그 전면의 소련군은 제28군이었다.




  이후의 상황은, 소련군 제28, 31군의 저항을 제외하면 거의 일방적인 소탕과 전진이었다. 8월 2일에 비야즈마 방면에서 소련군 서부전선군 사령부를 포위섬멸했고, 8월 3일에는 시체브카 방면에서 소련군 예비전선군 사령부를 섬멸했다. 시나리오 종료인 8월 6일까지 전진은 계속되어, 르제프, 모지아스크, 우그라. 스파스-데미얀스크, 키로프까지 도달하여 압도적인 승리를 달성했다. 북쪽의 르제프로부터 남쪽의 우그라에 이르기까지 모스크바 전면에서 160km 폭의 돌파구가 형성되었다.

  원래 시나리오의 종료는 8월 1일에 예정되어 있었으나, 시나리오 말기에 1턴씩 연기되어 결국 8월 5일까지 도달한 것이다. 연기될 것을 충분히 염두하고 비야즈마 방면의 기갑병력을 좀더 동진했다면 모스크바에 상당히 근접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지만, 어차피 이 시나리오에서는 모스크바의 점령은 의미가 없다.

  「Road to Moscow 1941」의 첫 단계 시나리오보다 그 공간적 규모가 거대하고 또 소련군의 병력도 많지만, 훨씬 많은 턴 수 덕분에 좀더 여유롭게 기동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매번 포착된 소련군 병력들을 탐색하고 우회하여 포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도로에 의존하지 않고 지형지물을 극복하며 기동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이점이었다.

  결과적으로 승리하기는 했지만, 초기의 계획이 어긋난 것 역시 결과이다. 거대한 단일 포위섬멸의 구상은, 초기부터 조우한 개별 상황에 대한 임기응변의 한정된 포위작전으로 전환되었다. 처음부터 모든 게 어긋난 셈이다. 예를 들어, 서 드비나 강의 북안으로 전진하던 기갑병력은 원래 비야즈마 선까지 전진할 예정이었으며, 서 드비나 강을 도하하여 소련군 2개 군을 포위한 건, 순전히 예상치 못한 당면한 위기에 대한 대응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포위전투가 그러했으니, 한마디로 운이 좋았다.

  시나리오 진행 중에서 어느 정도 장기적으로 예상하고 시도한 포위작전 중에 유일하게 현실화된 것은 슬라브고로드-크리케프-로슬라블 선의 포위작전이었는데, 이것도 이미 멀리 전진한 북익에 의해 사실상 포위망의 한쪽 날개가 완성되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임기응변 자체가 틀렸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당장의 조치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특히 전선 붕괴가 염려되어 행동한 것이었다. 시나리오 종료 이후의 결론이기는 하지만, 결국 원래의 내 구상이 현실과 맞지 않았다. 시나리오 진행 중에 접촉한 소련군의 야전군 개수와 배치를 따져보면, 오히려 무리하게 신장된 얇은 전선이 더욱 큰 위기를 초래했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신속한 단일 포위망을 형성하기에는 초기 남익의 병력이 부족했던 게 명확하다. 소련군이 질적으로는 낮기는 했지만 야전군 규모의 병력이 수적 우세로 역습을 가하면 상당한 위협으로 작용했다. 물론 그러한 위협을 내가 자초한 부분도 있다. SS 다스라이히 사단이 모길레프의 동쪽에 위치하여 소련군의 배후를 차단한 것은, 서쪽으로부터의 정면 압박이 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보병사단들이 그러한 압박 역할을 할 때까지 SS 다스라이히 사단은 적군의 배후에서 일종의 고립상태에 있었고 적 야전군의 공격을 견뎌야 했다.

  이번 시나리오에서 가장 만족스러웠던 것은 기동부대와 보병부대 간의 역할 분배가 효과적이면서 유연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기동부대는 공백지역이나 적군의 약점을 침투하여 우회와 전진에 전력하고, 후속하는 보병사단들이 포위의 강화와 소탕을 수행하는 방침이었지만, 비교적 앞서 전진한 보병사단들도 적군의 소탕을 후속 부대에게 맡기고 전진하면서 전차사단의 신속한 전진에 협조하고 대규모의 포위 형성에 기여했다. 그로 인해 기동부대가 시가지와 준비된 방어진지를 공격해야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고, 일시적으로 적군과 정면으로 접촉한 경우에는 보병부대와 교대하며 전진을 계속할 수 있었다. 전차사단과 차량화사단의 전투는 대체로 노출된 지형에서 소규모의 또는 포위된 적군에 대해서 수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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